1722년 4월 5일, 부활절 일요일 아침.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소속 탐험가 야코프 로헤벤(Jacob Roggeveen)의 배 세 척이 남태평양 한가운데서 육지를 발견했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보이지 않는 황량한 화산섬, 그런데 해안 곳곳에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얼굴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로헤벤은 이날의 발견을 기려 섬에 ‘파스쿠아(Pascua, 부활절)’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우리가 이스터섬이라 부르는 그곳, 원주민들은 ‘라파 누이’라 부르는 이 섬의 이야기는 이렇게 유럽인의 기록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어릴 때 백과사전에서 모아이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저 무거운 돌덩이를 대체 누가 어떻게 옮겼을까 하는 궁금증이 오래 남았던 기억이 있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과학자들은 여전히 답을 완전히 확정 짓지 못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새로 나온 연구들을 중심으로, 라파 누이가 품고 있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세 가지를 정리해봤다.
미스터리 1. 80톤 거인은 어떻게 걸었을까 — 모아이 운반의 비밀
섬 전역에 세워진 모아이는 887개에 달한다. 대부분 섬 동쪽의 화산 분화구 라노 라라쿠(Rano Raraku) 채석장에서 만들어졌고, 이 채석장에서 해안까지는 짧게는 수백 미터, 길게는 18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평균 무게 약 12.5톤, 가장 큰 것은 80톤을 넘는 돌덩이를 바퀴도 없고 대형 가축도 없던 섬에서 옮긴 방법을 두고 학계는 오랫동안 통나무 굴림설, 썰매설, 지렛대설 등을 놓고 씨름해왔다.
2011년 고고학자 테리 헌트와 칼 리포가 처음 제기한 가설은 조금 결이 달랐다. 모아이를 눕히지 않고 세운 채로, 좌우로 흔들며 지그재그로 걷게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라파 누이 전승에도 “석상이 걸어서 자리를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025년 10월, 이 가설을 물리학적으로 재검증한 연구팀은 무게 4.35톤짜리 실물 크기 모아이 복제품을 제작해 밧줄 세 가닥을 걸고 18명이 잡아당겨 흔드는 실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100미터를 40분 만에 이동. 그보다 앞서 1980년대 고고학자 찰스 러브는 통나무 롤러 방식으로 25명 미만의 인원이 9톤짜리 모형을 40미터, 단 2분 만에 옮긴 실험 결과를 남기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소수의 인력으로 충분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2025년 11월에는 라노 라라쿠 채석장 전체를 3D로 정밀 스캔한 국제 연구팀의 결과가 발표됐다. 채석장 안에서 서로 경계가 뚜렷한 30개의 독립된 조각 구역이 확인됐고, 구역마다 모아이의 비례와 조각 기법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하나의 중앙 조직이 통제한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가 아니라, 여러 씨족 집단이 각자의 구역에서 독자적인 전통으로 석상을 깎았을 가능성이 제기된 셈이다. 운반 방식이든 제작 방식이든, 모아이는 소수 권력자의 명령보다 공동체 단위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쪽에 점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미스터리 2. 이스터섬 문명은 정말 스스로 무너졌을까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문명의 붕괴>를 통해 널리 퍼진 이야기가 있다. 라파 누이 사람들이 모아이를 세우는 데 집착한 나머지 섬의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 생태계를 파괴했고, 그 결과 식량이 고갈되며 부족 간 전쟁과 인구 붕괴로 이어졌다는 이른바 ‘생태학살(ecocide)’ 서사다. 1200년경 폴리네시아에서 카누를 타고 건너온 정착민들이 한때 수만 명까지 늘었다가 로헤벤이 도착한 1722년에는 3천 명 남짓으로 급감했다는 주장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2024년 6월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된 논문이 이 오래된 학설을 정면으로 흔들었다. 빙엄턴대의 칼 리포 교수와 컬럼비아대 딜런 데이비스 박사 연구팀이 섬 전역의 고대 농경지를 위성 이미지와 인공지능으로 분석한 결과, 라파 누이의 인구가 4천 명을 넘어선 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놓은 것이다. 큰 인구 붕괴가 있으려면 애초에 큰 인구 증가가 있었어야 하는데, 그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코펜하겐대의 모레노-마야르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태학적 자살이라는 개념 자체가, 원주민이 자원을 관리하지 못해 스스로 몰락했다는 식민지 시대의 서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대신 최근 연구들이 주목하는 건 가뭄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섬에 수백 년에 걸친 건조 기후가 이어졌다는 기후 데이터가 확인되면서, 라파 누이 사람들이 붕괴한 게 아니라 척박해진 환경에 맞춰 농법과 사회 구조를 계속 바꿔가며 적응해왔다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1722년 로헤벤 일행이 마주한 섬 주민들은 활기차고 체격도 건강했다고 항해 일지에 기록돼 있다. 인구가 정말 곤두박질친 시점은 오히려 그 이후, 유럽인이 옮긴 전염병과 19세기 페루 노예 상인들의 납치가 겹친 때였다.
미스터리 3. 아직 아무도 읽지 못한 문자, 롱고롱고
이스터섬에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나무 판 위에 새겨져 남아 있다. ‘롱고롱고(rongorongo)’라 불리는 이 문자는 19세기 선교사들이 처음 기록했는데, 현재 전 세계 다섯 개 나라 박물관에 흩어져 있는 진품 목판은 겨우 26점뿐이다. 여기 새겨진 개별 글자는 400종이 넘고, 전체 글자 수는 약 1만 5천 자에 달하지만 지금까지 완전히 해독된 문장은 단 하나도 없다.
2024년 발표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는 이 문자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에 새로운 실마리를 던졌다. 로마에 소장된 목판 하나의 나무 재질을 분석한 결과, 그 나무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사이에 베어진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유럽인이 섬에 처음 발을 들인 1722년보다 최소 150년 이상 앞선 시기다. 유럽 문자 체계를 보고 흉내 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는 물증인 셈이라, 라파 누이 사람들이 외부 접촉 없이 독자적으로 문자를 발명했을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다만 해독이 어려운 이유는 명확하다. 두 언어로 나란히 적힌 대조 텍스트가 없고, 문법을 유추할 만큼 긴 문장도 남아 있지 않으며, 문자를 읽을 줄 아는 마지막 세대는 19세기 후반 페루 노예상들에게 끌려가거나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 학자들이 의미를 어느 정도 특정한 부분은 태음력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목판 한 조각 정도이며, 그마저도 완전히 읽어내지는 못한다. 로제타석 같은 열쇠가 나오지 않는 한, 롱고롱고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침묵할 가능성이 크다.
자주 묻는 질문
모아이 석상은 총 몇 개나 되나요?
섬 전역에 887개의 모아이가 확인돼 있다. 이 중 약 397개는 라노 라라쿠 채석장 안팎에 그대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해안가 제단(아후) 위로 옮겨져 세워졌다. 평균 무게는 12.5톤, 가장 큰 것은 20미터에 육박하는 크기로 완성되지 못한 채 채석장에 남아 있다.
이스터섬은 언제, 누가 처음 유럽에 알렸나요?
1722년 4월 5일 부활절 일요일,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소속 탐험가 야코프 로헤벤이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섬에 도착했다. 그가 항해 일지에 남긴 기록이 유럽 사회에 이스터섬의 존재를 처음 알린 문서로 남아 있다.
롱고롱고는 지금까지 해독됐나요?
아니다. 26점의 진품 목판에 새겨진 약 1만 5천 자, 400여 종의 글리프 가운데 완전히 해독된 문장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 태음력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 일부만 부분적으로 해석됐을 뿐, 나머지는 여전히 미해독 상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