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겨울의 밤은 소리부터 다르다고 한다. 바람이 나뭇가지가 아니라 눈 자체를 긁으며 지나가는 소리, 텐트 천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풀렸다 하며 우는 소리. 영하 25도, 초속 10미터가 넘는 바람이 몰아치던 1959년 2월 2일 새벽, 러시아 우랄산맥 북부의 이름조차 없던 1079봉 비탈에서 그 소리 사이로 텐트 천이 찢기는 소리가 하나 더 섞였다. 그것도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부터, 칼로. 스물셋의 이고르 드야틀로프가 이끌던 아홉 명이 그날 밤 텐트를 버리고 눈밭으로 흩어졌고, 그중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문은 멀쩡히 있었는데 왜 굳이 벽부터 찢었을까. 이 비합리적인 선택 하나가 반세기 넘게 사람들을 이 사건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다.
우랄공대 아홉 명, 오토르텐산을 향해 떠나다
사건의 출발은 대단할 것 없는 겨울 산행이었다. 우랄공과대학교(현 우랄연방대학교) 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스키 원정대 열 명이 1959년 1월 23일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를 떠났다. 목적지는 해발 1234미터의 오토르텐산, 소련 등산연맹 기준으로 최고 난이도인 3급 코스였다. 대장은 이고르 드야틀로프(23)였고, 지나이다 콜모고로바(22), 루스템 슬로보딘(23), 니콜라이 티보-브리뇰(23), 알렉산드르 콜레바토프(24), 류드밀라 두비니나(20), 유리 도로셴코(21), 유리 크리보니셴코(23), 그리고 일행 중 최연장자였던 세묜 졸로타료프(38)가 함께했다. 사진 필름에 남은 마지막 기록들을 보면 눈싸움을 하고 서로 장난치는 모습까지 담겨 있어, 이들이 얼마나 이 여행을 즐기고 있었는지가 오히려 더 아프게 다가온다.
원래는 열 명이었다. 유리 유딘이라는 대원이 좌골신경통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1월 28일 ‘2번째 북부’라는 정착촌에서 하차했다. 그날의 이 결정 하나로 유딘은 유일한 생존자가 됐는데,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홀가분해하지 못했다. 그는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매년 동료들의 기일에 묘지를 찾았고, 2013년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도 그들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축복이 아니라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텐트를 왜 벽부터 찢고 나갔을까
2월 1일, 아홉 명은 콜라트 샤흘 산(만시어로 ‘죽은 자의 산’이라는 뜻이다)의 동쪽 비탈에 텐트를 쳤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숲 지대까지 더 내려가 야영했어야 했는데, 날씨 탓인지 시간 계산이 어긋난 탓인지 바람을 그대로 맞는 노출된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사관들이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텐트 옆면이 안쪽에서 바깥으로 여러 군데 칼로 찢겨 있었다. 신발도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일부는 양말 바람으로 일부는 맨발로 뛰쳐나간 흔적이었다. 영하 25도의 눈밭으로 맨발로 나설 만큼 급박했던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답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3주 만에 발견된 텐트, 그리고 텅 빈 눈밭
약속한 귀환일이었던 2월 12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가족들이 대학 측에 항의했고, 2월 20일부터 본격적인 수색이 시작됐다. 수색대가 텐트를 찾아낸 건 2월 26일이었다. 텐트 안에는 배낭과 식량, 심지어 보드카 한 병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정작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텐트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곳, 눈 속에 반쯤 파묻힌 큰 삼나무 아래에서 크리보니셴코와 도로셴코의 시신이 속옷 차림으로 발견됐다. 나무에는 사람 손이 닿기 힘든 높이까지 가지가 부러진 흔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필사적으로 기어올라 주변을 살피려 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그 나무에서 텐트 방향으로 300미터쯤 되돌아간 지점에서는 드야틀로프, 콜모고로바, 슬로보딘 세 명이 마치 텐트로 돌아가려던 자세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시신을 찾는 데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은, 그해 겨울 그 지역 적설량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5월에야 드러난 나머지 네 구, 부상은 왜 더 심했나
눈이 녹기 시작한 5월 4일과 5일,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에서 나머지 네 구가 눈 4미터 아래에서 발견됐다. 두비니나, 졸로타료프, 콜레바토프, 티보-브리뇰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부상 정도가 앞서 발견된 다섯 명과 확연히 달랐다. 티보-브리뇰은 두개골이 함몰돼 뼛조각이 뇌 조직까지 파고든 상태였고, 졸로타료프와 두비니나는 흉부 골절이 워낙 심해서 스베르들롭스크 법의학연구소의 검시관 보리스 보즈로즈덴니 박사가 “차량 충돌 사고에 준하는 강한 충격”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그런데도 몸 표면에는 그만한 충격을 만들 만한 외상 흔적이 뚜렷하지 않았다. 두비니나는 혀와 눈이, 콜레바토프는 눈썹까지 사라진 채 발견돼 언론과 조사관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는데, 이 부분은 계곡물에 두 달 넘게 잠겨 있으면서 생긴 부패나 작은 동물의 접촉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그 시절 소련 수사 기록만으로는 확정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소련 당국의 결론 — “알 수 없는 압도적인 힘”
사건을 맡은 검사 레프 이바노프는 1959년 5월 28일 수사를 종결하면서 사인을 “저항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정리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 힘이었는지는 끝내 밝히지 않은 채였다. 관련 파일 상당수가 1990년대 초까지 비공개로 남아 있었는데, 냉전기 소련 특유의 정보 통제가 이런 식으로 진실을 반세기 가까이 묻어버린 사례는 이 사건 하나만은 아니다. 예전에 다룬 냉전기 실종 사건 기사에서도 국가 기록이 뒤늦게 공개되며 진실의 조각이 뒤늦게 맞춰지는 비슷한 패턴이 나온 적이 있다. 일부 대원의 옷가지에서 방사능 수치가 정상보다 높게 측정됐다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조사 결과 1957년 인근에서 발생한 키시팀 원자력 사고의 잔류 오염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다만 이 역시 완전히 확정된 설명은 아니다.
군사실험설부터 인프라사운드설까지, 쌓여온 가설들
답이 나오지 않은 채로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가설은 자연스레 쌓여갔다. 사건 직후에는 인근에 거주하던 원주민 만시족이 신성한 산에 침입한 외지인들을 공격했다는 설이 돌았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텐트 주변에 외부인의 발자국이나 몸싸움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이 가설은 빠르게 힘을 잃었다. 사건 당일 밤 다른 등반팀들이 하늘에서 주황색 불빛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군사 미사일 실험이나 낙하산 기뢰 폭발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3년 저널리스트 도니 아이카가 쓴 책 「데드 마운틴」에서는 콜라트 샤흘 산의 지형이 강풍과 만나 카르만 소용돌이를 만들고, 이것이 사람 귀에 들리지 않는 인프라사운드를 발생시켜 원인 모를 공황을 유발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발상 자체는 흥미로운데, 의외로 이 가설을 뒷받침할 물리적 증거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2021년, 스위스 연구팀이 내놓은 슬랩 눈사태 이론
가장 최근에, 그리고 가장 정교한 과학적 설명은 2021년 1월 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어스 앤드 인바이런먼트」에 실린 논문에서 나왔다. 취리히 연방공대(ETH 취리히)의 지반공학 교수 알렉산더 푸진과 로잔 연방공대(EPFL)의 요한 곰 교수가 공동으로 발표한 이 연구는, 대원들이 눈 비탈을 깎아 텐트 자리를 만든 것 자체가 원인이 됐을 가능성을 수치 모델로 제시했다. 강한 카타바틱 바람이 밤새 눈을 실어 날라 비탈 위쪽에 판 형태의 눈덩이(슬랩)를 쌓았고, 이것이 시간차를 두고 무너져 내리면서 자던 대원들을 덮쳤다는 시나리오다. 눈사태치고는 경사가 완만해서 오랫동안 배제됐던 가설인데, 막상 보면 자동차 충돌 실험 데이터를 인체 모형에 적용한 시뮬레이션 결과가 앞서 언급한 흉부·두개골 손상 패턴과 상당히 비슷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2019년부터 2020년 사이 러시아 검찰이 재개한 조사에서도 담당 검사 안드레이 쿠랴코프가 비슷한 결론에 무게를 실었다. 다만 슬랩이 무너진 흔적은 며칠 안에 새 눈으로 덮여 사라지는 특성 때문에, 현장에 남은 물리적 증거만으로 이 가설을 완전히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그래도 남는 의문들
눈사태 이론이 여러 물리적 손상 패턴을 설명해 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텐트를 왜 벽부터 찢고 나갔는지, 왜 300미터나 떨어진 지점까지 뿔뿔이 흩어졌는지, 방사능 수치와 목격된 불빛은 정말 우연이었는지를 놓고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완전히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어느 한 가설이 사실로 확정됐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극한의 저체온증 속에서 사람이 보이는 이상 행동(체온이 급격히 떨어질 때 오히려 옷을 벗는 ‘패러독시컬 언드레싱’ 현상)과 지형적 눈사태, 그리고 통신이 제한된 냉전기 소련 사회의 정보 공백이 겹쳐 만들어진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지금은 조금 더 무게를 얻고 있는 정도로 정리하는 편이 안전하다. 아홉 개의 무덤 앞에 매년 꽃을 놓는 사람들이 아직 예카테린부르크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그 어떤 가설보다 분명하다.
자주 묻는 질문
Q1. 생존자는 정말 한 명도 없었나요?
아홉 명 전원이 사망했다. 원래 원정대는 열 명이었고, 유리 유딘이라는 대원이 출발 며칠 후 좌골신경통으로 중도 하차해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다. 유딘은 201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료들의 유해를 확인하는 등 사건 규명에 협조했다.
Q2. 방사능이 검출됐다는 게 사실인가요?
일부 대원의 옷에서 기준치보다 높은 방사능이 측정된 건 사실로 기록돼 있다. 다만 이것이 무기 실험 때문인지, 1957년 키시팀 사고의 잔류 오염 때문인지는 조사 당시에도 명확히 결론 나지 않았고, 지금도 여러 해석이 공존한다.
Q3. 최근 러시아 정부의 재조사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2019년 재개된 조사에서 러시아 검찰총장실은 눈사태를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하며 2020년 결론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결론이 모든 논란을 끝낸 건 아니어서, 유가족 일부와 연구자들은 여전히 세부 정황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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