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년 8월 18일, 존 화이트는 손녀의 세 번째 생일을 축하하러 대서양을 건넜다. 배 밑창에는 손녀에게 줄 선물 꾸러미와 3년치 그리움을 눌러 담은 편지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생일 케이크가 아니라 텅 빈 울타리와 바람 소리뿐이었다. 사람도, 시신도, 싸운 흔적도 없었다. 117명이 통째로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나무 기둥에 새겨진 단어 하나, “CROATOAN”이었다.
1587년, 신대륙에 세운 마을
이야기는 그보다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87년 5월, 잉글랜드 탐험가 존 화이트는 남성 84명, 여성 17명, 아이와 청소년 11명 등 총 117명을 이끌고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주 로어노크 섬에 도착했다. 목적은 단순했다. 스페인이 독점하다시피 하던 신대륙에 잉글랜드의 발판을 박아 넣는 것. 그해 8월 18일, 화이트의 딸 엘리너 데어가 딸을 낳았다. 이름은 버지니아 데어. 북미 땅에서 태어난 최초의 잉글랜드인 아기였다.
마을은 순조롭게 자리를 잡는 듯했다. 그런데 보급품이 문제였다. 곡식도 도구도 부족했고, 화이트는 손녀가 태어난 지 아흐레 만에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본국에서 물자를 구해 가을 안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이때만 해도 이 짧은 이별이 3년으로 늘어질 줄은, 그리고 그 이별이 영영 끝나지 않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화이트가 귀국한 직후 잉글랜드와 스페인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해협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모든 선박을 징발해버렸다. 로어노크로 가는 배 따위는 사치였다. 화이트는 발이 묶인 채 무려 3년을 흘려보내야 했다. 겨우 배를 구해 대서양을 다시 건넌 게 1590년 8월 18일, 공교롭게도 손녀의 생일이었다.
텅 빈 마을과 나무에 새겨진 단서
배에서 내린 화이트가 본 건 상상과 전혀 달랐다. 집들은 이미 철거되어 있었고 울타리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급하게 도망친 흔적은 아니었다. 오히려 짐을 챙기고 문을 정리한, 계획된 이동에 가까웠다. 그리고 울타리 기둥에는 “CROATOAN”이라는 아홉 글자가, 근처 나무에는 “CRO”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의아한 대목이 하나 있다. 떠나기 전 화이트와 정착민들은 위험에 처하면 십자가 표시를 남기기로 약속해두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십자가는 없었다. 적어도 이 단어를 새길 당시에는 급박한 위협 상황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크로아토안은 로어노크에서 남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섬, 지금의 해터라스 섬을 가리키는 원주민 부족이자 지명이었다. 화이트는 서둘러 닻을 올리고 그리로 향했지만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에 밧줄이 끊어지고 배는 좌초 직전까지 몰렸다. 선원들은 더 이상의 항해를 거부했고, 배는 방향을 돌려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화이트는 그 뒤로도 몇 차례 재출항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후원자를 구하지 못했고, 끝내 다시는 신대륙 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손녀를, 딸을, 정착민 117명 전원을 마지막으로 찾아 나선 순간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 셈이다.
네 갈래로 갈리는 가설들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단연 원주민 동화설이다. 정착민들이 스스로 크로아토안 부족의 마을로 옮겨가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인데, 나무에 새겨진 단서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그럴듯한 만큼 동시에 미심쩍은 구석도 있다. 117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이 흔적도 없이 다른 공동체에 완전히 녹아들었다는 게, 말처럼 간단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완전히 비극적인 학살설도 고개를 든다. 로어노크 인근에는 정착민들과 사이가 틀어진 부족들도 있었다. 훗날 제임스타운을 세운 존 스미스는 1607년경 원주민 추장 포우하탄으로부터 “로어노크 사람들이 이웃 부족의 습격으로 몰살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에 남겼다. 심지어 그 습격이 백인 정착민의 존재를 예언한 주술사의 경고 때문이었다는 세부 진술까지 곁들여져 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20년 가까이 지난 뒤의 2차 전언이다. 시신이나 무덤 같은 물증은 지금까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세 번째, 가뭄과 기근설은 최근 들어 힘을 받는 쪽이다. 버지니아주 참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한 1998년 연구에 따르면 1587년부터 1589년 사이 이 지역은 지난 800년 통틀어 가장 혹독한 가뭄을 겪었다. 식수와 곡식이 동시에 바닥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굶주림에 몰린 정착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여러 원주민 마을에 나뉘어 흡수됐을 수 있다는 추정과도 맞물린다. 의외로 최근 발굴에서 이 시나리오를 뒷받침하는 흔적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과학이 던진 또 다른 용의선상은 스페인이다. 당시 스페인은 잉글랜드가 신대륙에 발판을 마련하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실제로 1588년 스페인 정찰선이 로어노크 인근 해안을 훑고 지나가며 버려진 정착지 흔적을 발견했다는 항해 일지가 스페인 국립문서보관소에 남아 있다. 정찰대는 마을이 이미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별다른 조치 없이 며칠간 해안에 머물다 돌아갔다고 적혀 있을 뿐, 정작 마을을 파괴하거나 정착민을 나포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다. 유력한 배후로 자주 거론되지만, 막상 파헤쳐 보면 정황뿐인 셈이다.

21세기 삽으로 파헤친 새로운 단서
이 사건이 흥미로운 건 400년이 넘도록 여전히 발굴이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2024년 First Colony Foundation은 노스캐롤라이나 버티 카운티의 이른바 ‘사이트 Y’ 지역을 재발굴해 16세기 잉글랜드산 도자기 파편들을 추가로 찾아냈다. 로어노크에서 내륙 쪽으로 이동한 무리가 있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자료다.
해터라스 섬 쪽 성과도 만만치 않다. 고고학자 스콧 도슨과 마크 호튼이 이끄는 크로아토안 고고학 프로젝트는 1998년부터 이 섬을 파고 있는데, 인장 반지, 총기 부품, 잉글랜드산 동전 같은 유물이 원주민 유적층에서 함께 출토됐다. 2025년 5월에는 대장간 작업의 부산물인 쇳조각 무더기 두 곳이 새로 발견됐는데, 흡사 어제까지 누군가 쓰다 만 작업대를 그대로 덮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고 발굴팀은 전했다. 정착민 중 일부가 이곳에서 도구를 직접 만들며 살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물증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이 결과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원로 고고학자 에릭 클링겔호퍼는 당시 지도들을 재검토한 결과 크로아토안 부족의 실제 거주지가 해터라스 섬이 아니라 현재의 데어 카운티 본토 쪽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지명 하나를 두고도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갈리는 셈이니, 100퍼센트 확실한 결론은 아직 요원하다.
왜 아직도 못 풀렸을까
단서가 이렇게 많이 쌓였는데 왜 아직 정답이 안 나왔을까 싶을 수 있다.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문자로 남은 기록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착민들은 일기를 남기지 않았고, 원주민 공동체의 구전은 시간이 지나며 여러 갈래로 변형됐다. 게다가 노스캐롤라이나 해안 지형은 지난 400년 동안 침식과 퇴적을 반복하며 크게 바뀌었다. 당시 유적이 지금은 바닷속에 잠겨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단일 가설보다 복합 시나리오가 힘을 얻는 분위기다. 정착민 117명 전원이 한 곳으로 이동한 게 아니라, 몇몇 무리로 흩어져 각기 다른 원주민 공동체에 나뉘어 흡수됐으리라는 쪽이다. 한 집단은 해터라스로, 다른 집단은 내륙으로, 또 일부는 가뭄과 굶주림 속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벌써 4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117명의 흔적은 노스캐롤라이나의 짙은 해무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셈이다.
자주 묻는 질문
Q1. 정말 117명 전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요?
기록상 그렇게 전해진다. 존 화이트가 남긴 항해 기록에 근거한 숫자로, 남성 84명, 여성 17명, 어린이와 청소년 11명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항해 중 사망하거나 이탈한 인원까지 정확히 반영됐는지는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학자에 따라 117명에서 121명 사이로 추정치가 갈린다.
Q2. CROATOAN이라는 글자가 나중에 위조됐을 가능성은 없나요?
화이트 본인이 직접 남긴 항해 기록에 그 글자를 목격한 정황이 상세히 적혀 있고, 새김 방식이나 위치가 당시 정착민들이 미리 약속해둔 신호 체계와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위조 가능성은 낮게 본다. 다만 그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이동 경로인지 단순한 지명 표기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석이 갈린다.
Q3. 버지니아 데어의 이후 행적은 밝혀졌나요?
아니다. 화이트의 손녀이자 신대륙 최초의 잉글랜드인 아기였던 버지니아 데어의 이후 행적을 알려주는 직접 증거는 지금까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해터라스 섬에서 나온 유물들이 그와 같은 세대 아이들의 흔적일 가능성은 거론되지만, 개인을 특정할 만한 자료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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