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본토에서 3,700km 떨어진 태평양 한가운데, 인구 8천 명이 안 되는 작은 섬에 키 4m짜리 돌 얼굴 900개가 늘어서 있다는 사실부터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스터섬(라파누이)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다들 “외계인이 만든 거 아니냐”는 농담부터 던지는데,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그 실없는 농담이 어쩌면 인간에게 보내는 가장 큰 찬사였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학자들도 한동안 “대체 어떻게”라는 질문 앞에서 속 시원한 답을 못 내놨으니까. 그런데 2025년 11월 27일,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PLOS ONE)에 흥미로운 논문 하나가 실리면서 이 오래된 수수께끼의 퍼즐 조각이 하나 더 맞춰졌다. 다름 아니라 “대체 누가 이 일을 주도했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단서였다.
모아이는 누가, 언제 만들었나
모아이(Moai)는 1250년부터 1500년 사이, 폴리네시아 동쪽 끝 라파누이족이 조각한 사람 얼굴 모양 석상이다. 25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꾸준히 만들어졌다는 뜻인데, 이게 벌써 첫 번째 반전이다. 한 왕이 즉위 기념으로 한꺼번에 세운 게 아니라, 세대를 넘나들며 이어진 프로젝트였다는 얘기다. 섬 전체에 흩어진 석상 수는 약 900개, 평균 무게는 12.5톤. 가장 큰 것은 “엘 기간테”라는 별명이 붙은 미완성 석상으로, 완성됐다면 21m에 무게가 270톤을 넘었을 거라는 추정이 나온다. 저 무게를 실감하려면 시내버스 스무 대를 겹쳐 놓은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중앙 권력이 다 만들었을 거란 생각, 틀렸다
보통 이런 대규모 석상 프로젝트라고 하면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왕이 명령을 내리고 수만 명이 동원되는 그림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미국 빙엄턴대(Binghamton University)와 애리조나주립대(Arizona State University) 공동 연구팀이 라노 라라쿠(Rano Raraku) 채석장 일대를 다시 조사한 결과는 좀 달랐다. 채석장 안에서 최소 30개의 독립된 작업 구역이 확인됐고, 각 구역마다 조각 방식이 미묘하게 달랐다는 것이다. 얼굴부터 먼저 새기는 팀, 몸통 블록을 통째로 떠내는 팀, 수직 절벽 지형에 맞춰 옆으로 눕혀 작업하는 팀까지 — 마치 각 동네 목수마다 손에 익은 방식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걸 보고 연구팀이 내놓은 결론은 “하나의 중앙 권력이 총지휘한 게 아니라, 소규모 친족 집단 여럿이 수평적으로 협업했다”는 쪽이었다. 왕정 국가라기보다는 이웃한 씨족들이 각자 구역을 맡아 경쟁하듯, 혹은 협력하듯 작업했다는 그림에 가깝다. 라파누이 인구가 한창때도 1만 5천 명 안팎이었다는데, 요즘으로 치면 웬만한 아파트 단지 두세 개를 합친 정도의 사람들이 12톤짜리 돌을 900개나 깎아냈다는 얘기다. 그러니 오히려 이 편이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거대한 관료제 없이도, 이웃 씨족끼리 “저쪽은 벌써 저만큼 세웠는데” 하며 은근히 자극받았을 법한 소규모 경쟁 구도라면 충분히 가능한 규모니까.
그럼 저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겼을까
채석장에서 만들었다는 건 알겠는데, 문제는 완성된 석상 대부분이 채석장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가 아후(Ahu, 제단)에 서 있다는 점이다. 바퀴도 없고 대형 가축도 없던 섬에서 12톤짜리 돌을 어떻게 끌고 갔을까 싶은데, 이 질문 하나가 학자들 머리를 수십 년째 쥐어짜게 만든 해묵은 숙제였다. 한때는 통나무를 깔고 굴렸다는 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는데, 라파누이는 삼림 파괴가 심각했던 섬이라 그 많은 통나무가 어디서 났느냐는 반박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2012년 미국 학자 칼 리포(Carl Lipo)와 테리 헌트(Terry Hunt)가 내놓은 “걷는 모아이” 가설이 꽤 화제를 모았다. 밧줄 세 개를 석상 상단부에 묶어 좌우로 번갈아 당기면,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석상이 이동한다는 실험이었다. 성인 두세 명이 덩치 큰 냉장고를 억지로 옮길 때 양옆으로 기울여가며 뚱땅뚱땅 걷게 만드는 그 동작을 떠올리면 딱 맞다 — 왼쪽 밧줄을 당기면 오른쪽으로 무게가 쏠리며 한 걸음, 다시 오른쪽 밧줄을 당기면 왼쪽으로 한 걸음, 이런 식으로 갸우뚱거리며 조금씩 전진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라파누이 후손들의 구전 설화에도 “모아이가 스스로 걸어서 자리를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는 점이 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전설이 은유였을 뿐이라는 건데, 은유치고는 꽤 정확한 물리학적 묘사였던 셈이다.

왜 만들었나 — 조상신을 마주 보게 하다
모아이가 왜 만들어졌는지는 비교적 합의가 잘 이뤄진 편이다. 라파누이 사회에서 모아이는 조상의 영혼, 즉 마나(mana)를 담는 그릇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석상은 바다가 아니라 마을 쪽을 바라보도록 세워졌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 반대로, 바다를 감시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후손들을 지켜보고 보호하려고 마을 방향으로 얼굴을 돌린 것이다. 눈이 텅 비어 있는 석상이 많은데, 원래는 산호로 만든 흰자와 흑요석 눈동자를 끼워 넣어 “눈을 뜬” 상태로 완성했다는 흔적도 발굴되었다. 눈을 넣는 의식을 치른 순간부터 그 석상에 실제로 영적인 힘이 깃든다고 믿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조상신을 향한 이 거대한 신앙은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았다. 이렇게 애지중지 만들어 세운 석상들이 정작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무렵에는 대부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1722년 네덜란드 탐험가 야코프 로헤베인(Jacob Roggeveen)이 부활절 일요일에 이 섬을 발견해 “이스터섬”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만 해도 상당수 석상이 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 100여 년 사이 부족 간 갈등 속에서 서로의 조상신을 상징하는 석상을 일부러 쓰러뜨리는 일이 벌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제한된 섬 안에서 인구가 늘고 경작지와 목재가 바닥나면서, 씨족 간 다툼이 상대방의 신앙 그 자체를 겨냥하는 방향으로 번져간 셈이다.
여전히 남은 수수께끼들
2025년 연구로 “누가”에 대한 답은 한결 또렷해졌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조각도 있다. 채석장에서 최종 목적지까지 정확히 어떤 도구와 인원으로 이동시켰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됐는지는 여전히 추정에 머물러 있다. 몸통은 채석장에 묻힌 채 얼굴만 지상에 드러나 있는 석상 사진을 본 적 있을 텐데, 이것도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다. “얼굴만 있는 석상”이 아니라, 화산섬 특유의 부드러운 화산재와 흙이 비바람에 씻겨 내려와 수백 년간 서서히 쌓이면서 몸통 전체가 지하에 파묻힌 것뿐이다. 실제로 발굴해보면 몸통에 등에 새긴 문양이나 팔 모양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미스터리가 풀린다고 해서 신비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설명보다 “8천 명 남짓한 섬사람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이웃끼리 경쟁하듯 돌을 깎았다”는 진짜 이야기가 오히려 더 놀랍게 느껴진다. 도구도 크레인도 없이 순전히 사람의 손과 협력만으로 저만한 규모의 유산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초자연적 설명보다 인간에 대해 더 많은 걸 말해주는 셈이다.
자주 묻는 질문
모아이 석상은 실제로 몇 개나 남아 있나요?
현재까지 확인된 모아이는 약 887~900개 사이로 집계된다(조사 기관마다 미세하게 다르게 발표한다). 이 중 완전히 서 있는 상태로 아후 위에 놓인 것은 절반이 채 안 되고, 나머지는 채석장 주변에 미완성으로 남았거나 이동 도중 쓰러진 채 방치된 경우다. 가장 유명한 아후 통가리키(Ahu Tongariki)에는 석상 15개가 나란히 복원되어 있는데, 이건 1960년 쓰나미로 흩어졌던 것을 1990년대에 일본 기업의 후원으로 다시 세운 결과다.
이스터섬을 직접 여행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스터섬(라파누이)은 칠레령이라 보통 산티아고를 경유해서 들어간다. 산티아고에서 이스터섬까지 항공편으로 약 5시간 반이 걸리고, 라탐항공(LATAM)이 사실상 유일한 정기 노선을 운항한다. 섬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 입장료(약 80달러 상당, 현지 통화 기준 변동 있음)를 내고 국립공원 형태로 관리되는 구역을 둘러보게 된다. 한국에서 간다면 최소 이틀은 이동에만 써야 하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라, 남미 여행 일정에 묶어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하필 이 섬에서만 이런 거대 석상 문화가 발달했나요?
폴리네시아 다른 섬에서도 조상 숭배 문화와 석조 유물은 존재하지만, 이스터섬만큼 규모가 크고 통일된 양식으로 발전한 사례는 드물다. 학자들은 섬이 극도로 고립돼 있었다는 점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가장 가까운 유인도까지도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보니 외부와 교류가 거의 없었고, 자연히 독자적인 신앙 체계와 조각 전통이 수백 년간 방해받지 않고 축적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 이 글은 공개된 학술 연구 및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정리한 콘텐츠이며, 최신 발굴 결과에 따라 세부 수치나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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