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아 에어하트 실종 사건 — 세계 최초 여성 비행사는 태평양 어디서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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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2일 오전 8시 43분, 태평양 한가운데를 떠돌던 무전기에서 여자 목소리 하나가 끊겼다. “우리는 157-337 선상에 있다. 남북으로 날고 있다.” 잡음 섞인 그 문장을 끝으로 신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87년이 지났고 소나와 위성사진, DNA 분석까지 동원한 탐사대가 줄줄이 태평양을 훑었지만, 아멜리아 에어하트와 그의 비행기는 여전히 어딘가에 묻혀 있다. 단순히 연료가 떨어져 바다에 추락했다고 보기엔 이상한 구석이 너무 많다.

왜 하필 이 사건만 백 년 가까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까. 아멜리아라는 이름이 여성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사, 그러니까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결정적 증거가 단 하나도 안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이유다. 사건이 미궁이면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채워 넣는다. 그래서 이 실종 사건에는 유독 서로 다른 세 가지 설명이 동시에 살아남아 있다.

세계일주 비행, 마지막 한 조각만 남아 있었다

1937년 당시 에어하트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1932년 대서양 단독 횡단 기록을 세운 뒤, 이번엔 적도를 따라 지구를 한 바퀴 도는 2만 9천 마일짜리 비행에 도전하고 있었다. 항법사는 프레드 누넌, 기체는 록히드 일렉트라 10E. 겉모습은 당대 최첨단이었지만 조종석 안 무전기와 항법 장비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손전등 수준이었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를 출발해 남미,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뉴기니 라에까지 왔을 때 남은 거리는 전체의 10분의 1도 안 됐다. 그런데 하필 가장 짧고 가장 위험한 구간이 마지막에 남아 있었다.

라에에서 다음 기착지인 하울랜드 섬까지는 2,556마일. 문제는 이 섬의 크기였다. 길이 3km, 폭 700m 남짓한 산호섬, 서울 여의도 면적의 절반도 안 되는 땅덩이가 태평양 한복판에 점 하나로 찍혀 있었다. 활주로도, 등대도 없고 무전 시설조차 임시로 급조된 상태였다. 미국 정부는 이 비행을 위해 하울랜드에 활주로를 새로 닦고 해안경비함 이타스카(Itasca) 호를 대기시켰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 그런데도 항법 오차가 몇 마일만 나도 섬을 통째로 지나칠 수 있는 구조였다. 축구장 몇 개를 합친 크기의 섬을, 육지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눈으로 찾아야 했던 셈이다.

1937년 7월 2일, 그날의 타임라인

현지 시각 오전 10시, 에어하트와 누넌을 태운 일렉트라기는 라에 활주로를 이륙했다. 최소 18시간 비행을 예상했고 일출 무렵 하울랜드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새벽 2시 45분부터 이타스카 호는 간헐적으로 에어하트의 음성을 수신하기 시작했다. 신호는 점점 강해졌다.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전 6시 14분, 그는 하울랜드까지 200마일 남았다고 보고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워 보였다.

그런데 이 순조로움 뒤에는 이미 어긋난 톱니바퀴가 돌고 있었다. 이타스카 호는 에어하트에게 계속 신호를 보냈지만 정작 그는 응답이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에어하트와 누넌 둘 다 모스 부호를 다룰 줄 몰랐고, 쓰던 무전 주파수도 서로 어긋나 있었다. 오전 7시 42분, “우리는 당신들 근처에 있는 게 분명한데 보이지 않는다. 연료가 부족하다. 고도 1,000피트로 비행 중”이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잡혔다. 배는 코앞에 있는데 섬이 안 보인다는, 듣는 사람 속을 태우는 보고였다.

1930년대 항공기 조종석 계기판과 무전 장비를 재현한 이미지

“연료가 부족하다” — 끊긴 마지막 교신

오전 8시 43분, 이타스카 호가 수신한 마지막 메시지는 “우리는 157-337 방위선 위에 있다. 남북으로 비행하며 반복하겠다”였다. 항법사 누넌이 태양선을 이용해 계산한 방위였는데, 정확한 위도는 언급하지 않았다. 무전 담당 승무원들은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춰가며 응답을 기다렸지만, 이 신호를 끝으로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의외로 이 메시지는 이타스카뿐 아니라 인근에 있던 일본 어선과 다른 나라 함정에도 잡혔다고 한다. 신호 자체는 꽤 넓게 퍼졌는데, 정작 위치를 특정할 단서는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하나다. 연료가 떨어지고 있다면서 왜 착수(着水)나 비상 상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을까. 이타스카 호 승무원들의 기록을 보면 에어하트의 목소리 톤은 침착했다고 한다. 다급함은 묻어 있었지만 패닉에 빠진 느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훗날 여러 가설이 갈라지는 시작점이 된다. 추락해서 바로 가라앉았다고 보기엔, 마지막 목소리가 너무 담담했다는 게 일부 연구자들이 계속 붙잡고 있는 대목이다.

사상 최대 규모 수색, 그런데도 아무것도 없었다

교신이 끊기자마자 수색이 시작됐다. 이타스카 호를 필두로 미 해군 순양함 USS 콜로라도, 항공모함 USS 렉싱턴까지 투입돼 군함 9척과 항공기 66대가 동원됐다. 수색 면적은 25만 제곱마일, 대략 한반도 면적의 세 배에 달했다. 17일간 이어진 이 작전에는 당시 돈으로 약 400만 달러,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7,500만 달러 가까이 들어갔다. 20세기 초반까지 인류가 벌인 수색 작전 중 최대 규모였다.

그런데도 잔해 하나, 기름띠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단순 추락이었다면 이 정도 규모로 훑었을 때 최소한의 부유물이라도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USS 콜로라도 소속 정찰기는 실종 일주일 뒤 니쿠마로로 섬(당시 이름 가드너 섬) 상공을 지나며 “최근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을 봤다고 보고했지만, 당시엔 무인도로 알려져 있었기에 별다른 조사 없이 그냥 넘어갔다. 이 판단 하나가 훗날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으로 되짚어진다.

수색이 벌어졌던 태평양 해역과 유사한 파도치는 바다 항공 사진

세 가지 시선, 세 갈래의 가설

이제부터 나오는 세 가지 가설은 성격이 다 다르다. 첫 번째는 가장 현실적이고 심심한 설명, 두 번째는 낭만과 미련이 섞인 이야기, 세 번째는 음모론에 가까운 극적인 상상이다. 어느 쪽을 더 믿고 싶은지는 읽는 사람 취향에 달렸지만, 증거의 무게는 결코 똑같지 않다.

가설 하나, 단순 추락 후 침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이렇다. 연료가 바닥나 하울랜드 근해 어딘가 바다에 추락했고, 록히드 일렉트라기는 그대로 가라앉았다는 것. 마지막 교신 위치와 항로를 계산하면 충분히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다. 다만 87년째 잔해를 못 찾고 있다는 게 이 가설의 가장 큰 약점이다. 2024년 1월, 미국 탐사업체 딥 씨 비전(Deep Sea Vision)이 수심 약 4,900m 해저에서 비행기 형상과 닮은 소나 이미지를 포착했다고 발표해 화제가 됐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재조사에서 이 물체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석 지형으로 결론 났다. 화제성만큼 뒷맛이 씁쓸했던 사례다.

가설 둘, 니쿠마로로 섬 표류설

항공 역사 탐사 단체 티가(TIGHAR)가 오랫동안 밀어온 가설이다. 요지는 에어하트와 누넌이 하울랜드를 못 찾고 남동쪽으로 약 560km 떨어진 니쿠마로로 섬 산호초에 불시착했고, 한동안 그곳에서 생존하다 사망했다는 것이다. 1940년 이 섬에서 사람 뼈 13조각이 발견됐는데, 당시 검시관은 남성의 것이라 결론 냈다. 그런데 2018년 미국 테네시대 법의인류학자 리처드 얀첸이 골격 비율을 다시 계산한 결과, 이 뼈가 에어하트의 체형과 통계적으로 상당히 일치한다는 재해석을 내놨다. 물론 원래 뼈 자체가 이미 유실돼 DNA 검사로 확정할 방법은 없다는 한계는 남는다.

놀랍게도 뼈만이 아니다. 같은 섬에서 1930년대 미국산 여성용 화장품 병, 주근깨 크림 용기, 신발 밑창 조각, 손거울 파편이 잇따라 발견됐다. 이 정도면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겹치는 게 너무 많다는 게 티가 측 주장이다. 그런데 반대편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 섬이 1930~40년대 영국령 길버트 제도 이주 정책으로 실제 사람이 살았던 적이 있으니, 화장품이나 신발 조각은 그때 이주민들 물건일 수 있다는 반박이다. 니쿠마로로 표류설은 정황은 풍부한데 결정적 증거인 비행기 잔해 자체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가설 셋, 일본군 포로설

세 번째는 가장 극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근거가 약한 가설이다. 에어하트와 누넌이 마셜 제도에 불시착해 일본군에 붙잡혔고, 사이판으로 이송된 뒤 그곳에서 처형당했다는 주장이다. 1960~70년대 사이판 주민 몇몇이 “백인 여성 조종사를 봤다”는 증언을 남기면서 퍼지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는 사진 한 장이 “포로로 잡힌 두 사람”이라며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그런데 조사해보니 이 사진은 1935년 일본 여행 안내서에 실린 것으로 확인됐다. 에어하트가 실종되기 2년 전에 이미 존재했던 사진이니, 증거로서는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일본 측 기록도 이 가설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당시 수색에 동원됐던 일본 해군 함정 고슈마루(Koshu Maru)의 통신사였던 코즈 사치나오는 훗날 저널리스트 아오키 후키코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을 산 채로든 죽은 채로든 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럴듯한 목격담과 사진이 나올 때마다 정작 당사자였을 일본 측 기록은 정반대 얘기를 하니, 이 가설은 여전히 심증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많다.

니쿠마로로 섬과 같은 남태평양의 작은 산호섬 항공 사진

최근 탐사는 뭔가 찾았나

그렇다면 요즘은 어디까지 왔을까. 2025년 11월, 퍼듀대학교 연구재단과 고고학유산연구소(ALI)가 공동으로 “타라이아 오브젝트 탐사”에 나섰다. 니쿠마로로 섬 인근 위성사진에서 발견된 길이 12~14m가량의 이상 물체를 직접 확인하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이 크기가 일렉트라 10E 동체 길이 12.2m와 거의 맞아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기대를 모았다. 퍼듀대는 에어하트의 모교이자 이번 비행의 후원자이기도 했으니, 이 탐사에 유독 진심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매번 신기술과 새 자금이 투입되는데도 여전히 결정적 증거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소나, 위성사진, DNA 분석까지 동원됐지만 그때마다 나온 결론은 “가능성 있음” 아니면 “암석으로 판명”이었다. 2024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가 관련 기밀 문서 5천여 쪽을 추가로 공개했지만 이 안에서도 결정적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확실한 건 딱 하나, 1937년 7월 2일 오전 8시 43분 이후 에어하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는 매년 새 탐사대를 불러 모은다. 세상이 온갖 첨단 장비를 동원해 태평양 바닥을 뒤졌음에도, 1937년 그날 아침의 마지막 몇 시간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멈춰 있다. 어쩌면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87년째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자주 묻는 질문

Q1.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시신이나 비행기 잔해가 공식적으로 발견된 적이 있나?
아니다. 1939년 1월 5일 미국 법원이 실종 당시 사망한 것으로 공식 선언했을 뿐, 유해나 기체 잔해가 확인된 사례는 지금까지 없다. 니쿠마로로 섬에서 나온 뼈는 이미 유실돼 재검증이 불가능하고, 2024년 딥 씨 비전이 찾았다던 소나 이미지도 암석으로 판명됐다.

Q2. 왜 하필 하울랜드 섬을 목표로 삼았나?
세계일주 항로상 라에에서 다음 급유지까지 갈 수 있는 거리 안에 있는 몇 안 되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워낙 작고 편의시설이 전무해 항법 오차에 매우 취약했고, 결과적으로 이 선택 자체가 실종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Q3. 세 가지 가설 중 어느 쪽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나?
다수 항공사학자들은 여전히 연료 소진 후 해상 추락설을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으로 본다. 니쿠마로로 표류설은 정황 증거가 쌓이고 있어 소수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있지만, 일본군 포로설은 핵심 사진 증거가 조작으로 밝혀지면서 근거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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