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니치 문서 미스터리 — 600년째 아무도 못 읽은 책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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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페이지짜리 책 한 권이 있다. 알파벳도 아니고 한자도 아닌 낯선 글자로 빼곡히 채워져 있고, 여백에는 처음 보는 식물과 벌거벗은 여인들이 목욕하는 그림, 그리고 별자리처럼 보이는 원형 도표가 가득하다. 그런데 이걸 아직도 아무도 못 읽었다. 세계 최고의 암호학자들이, 심지어 2차 대전 때 나치 암호를 깬 사람들까지 달려들었는데도 말이다. 이 책의 이름은 보이니치 문서(Voynich Manuscript)다.

1912년, 이탈리아 별장에서 발견된 낡은 책

시작은 평범했다. 1912년, 폴란드계 서적상 윌프리드 보이니치(Wilfrid Voynich)가 이탈리아 프라스카티 근처의 예수회 소유 별장 ‘빌라 몬드라고네’에서 오래된 책 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서적상이 낡은 창고에서 옛 책을 골라내는 일 자체는 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가 집어 든 한 권이 문제였다. 펼쳐보니 지금까지 알려진 그 어떤 문자 체계와도 일치하지 않는 글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채워져 있었다.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히브리어도, 아랍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작위한 낙서라고 하기엔 너무 규칙적이었다. 글자마다 등장 빈도가 있고, 자주 붙어 다니는 조합이 있고, 심지어 페이지마다 쓰는 어휘가 조금씩 달라지는 패턴까지 보였다. 언어학자들이 볼 때 이건 진짜 언어의 통계적 특징에 가까웠다. 낙서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정교했다.

오래된 가죽 장정 고서

예일대가 확인한 것: 최소한 ‘진짜 옛날 양피지’라는 사실

그럼 이거 근대에 만들어진 정교한 사기극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의심이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그런데 2009년, 이 필사본을 소장 중인 예일대학교 바이네키 희귀본·필사본 도서관이 애리조나대 연구팀에 양피지 조각의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을 의뢰했고, 결과는 1404년에서 1438년 사이로 나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도 전, 조선으로 치면 세종대왕 즉위 초반쯤 되는 시기다. 참고로 그 무렵 유럽에서는 이미 알파벳을 뒤섞어 만드는 초보적인 암호 문서가 여기저기서 쓰이고 있었으니, 이 책이 그 시대 어딘가의 산물이라는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학계는 이 결과에 한동안 술렁였다. 위조설 하나가 물리적 증거 앞에서 힘을 잃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대가 진짜라는 것과 내용이 실제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15세기에 만들어진 진짜 양피지 위에, 아무 의미 없는 글자를 정성껏 옮겨 적었을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책은 현재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예일대 바이네키 도서관 서고에 보관돼 있다.

서가에 꽂힌 오래된 책들

정체불명의 문자와 낯선 삽화들

보이니치 문서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장 당황하는 지점은 의외로 글자보다 그림일 때가 많다. 책은 크게 몇 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에는 실존하지 않는 것 같은 식물들이 뿌리와 잎까지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식물학자들이 여러 번 도전했지만 지금까지 지구상의 어떤 식물과도 완전히 일치시키지 못했다. 중반부로 가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벌거벗은 여성 여러 명이 초록빛 액체가 담긴 관 모양 구조물 속에 몸을 담그고, 그 사이사이를 배관처럼 보이는 선들이 복잡하게 연결한다. 무슨 실험실 도면 같기도 하고 목욕탕 배관도 같은, 어느 쪽으로도 딱 떨어지지 않는 낯선 장면이다. 그 옆으로는 별자리 모양의 원형 도표들이 이어진다. 후반부에는 작은 별 표시가 붙은 짧은 문단들이 촘촘하게 나열돼 있어서, 마치 약초 처방전이나 조제법 목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구성 때문에 초기 연구자들은 이 책을 중세 약초의학서(herbal)의 일종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식물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게 계속 걸린다. 약초책이라면서 있지도 않은 식물을 그렸다는 게 앞뒤가 안 맞기 때문이다.

암호학자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이유

이 정도로 이상한 텍스트라면 당연히 암호 해독 전문가들이 눈독을 들일 만하다. 실제로 그랬다. 1919년부터 여러 학자들이 도전했고, 특히 눈에 띄는 건 2차 세계대전 시기다. 앨런 튜링이 몸담았던 영국 블레츨리 파크 암호국 출신 인물들과, 미국 국가안보국(NSA) 창설 초기 암호분석가였던 윌리엄 프리드먼(William Friedman)까지 이 책에 매달렸다. 나치의 에니그마 암호를 깨고 미군 암호 체계를 설계했던 실력자들이 정작 500년 전 필사본 한 권 앞에서는 손을 들었다는 얘기다. 프리드먼은 수십 년에 걸쳐 이 문서를 연구했지만 결국 유의미한 해독에는 이르지 못했다. 학계는 이걸 두고 씁쓸한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에니그마보다 어려운 암호가 그것도 500년 전에 있었다니, 하고. 그 이후로도 수학자, 언어학자, 컴퓨터 알고리즘을 동원한 연구팀까지 계속 도전해왔지만, 학계에서 폭넓게 인정받는 해독 결과는 아직 하나도 없다. 그래서 암호학계에서는 이 필사본을 두고 ‘암호학자들의 무덤’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펼쳐진 양피지 문서

그럼 대체 뭐라는 걸까 — 갈리는 가설들

해독이 안 되니 가설만 무성하다. 가장 조심스러운 쪽은 알려지지 않은 자연어의 방언이나 소멸된 지역어를 어떤 방식으로 표기한 것이라는 가설이다. 반대편 극단에는 이 책이 정교한 사기극이라는 가설도 있다. 실제로 통계학자들 중 일부는 이 문자 패턴이 특정 규칙만 지키면 인간도 무의미한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실험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다만 이 가설은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증거는 아니라서 완전히 결론이 난 문제는 아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은 이 책이 인공적으로 설계된 언어, 그러니까 오늘날의 에스페란토 같은 만들어진 언어 체계라는 주장이다. 여성 삽화가 많이 등장한다는 점에 착안해 여성 건강이나 산부인과 관련 지식을 담은 책이라는 견해를 내놓은 연구자도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정황에 기댄 해석이고,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이 정도로 오랫동안 전 세계 최고 지성들이 매달렸는데도 여전히 답이 없다는 사실 자체다. 보통 이런 미스터리는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윤곽이라도 잡히기 마련인데, 보이니치 문서는 백 년 넘게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다.

직접 들여다보고 싶다면

여기까지 읽었으면 한 번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질 수 있다. 다행히 원본을 못 만지더라도 방법은 있다. 예일대 바이네키 도서관이 전체 240페이지를 고해상도로 스캔해 온라인에 그대로 공개해뒀기 때문에, 누구나 인터넷에서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그 낯선 글자와 삽화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전문 암호학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냥 몇 페이지만 넘겨봐도 왜 이 책이 백 년 넘게 사람들을 붙잡아두고 있는지 감이 온다.

자주 묻는 질문

Q1. AI로 이미 해독됐다는 뉴스를 본 것 같은데, 사실인가요?

몇 차례 그런 보도가 나온 적은 있다. 2018년 캐나다 앨버타대 연구팀이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이 문서가 히브리어 기반일 가능성을 제시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후 여러 학자들이 그 방법론과 결론에 대해 반박을 내놓았고, 지금까지 학계에서 폭넓게 검증되고 합의된 해독본은 나오지 않았다. 흥미로운 시도가 나올 때마다 화제는 되지만, ‘이걸로 확정’이라고 말할 단계는 아직 아니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Q2. 그럼 이 책은 대체 왜 만들어진 걸까요?

아쉽지만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은 없다. 약초의학서, 연금술 기록, 종교적 상징체계, 심지어 부유한 후원자를 속이기 위한 정교한 위조품이었다는 가설까지 다양하게 제기돼 있을 뿐, 어느 것도 결정적 증거로 뒷받침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은 여전히 ’15세기에 누군가 작정하고 만든, 이유를 알 수 없는 텍스트’로 남아 있다.

Q3. 전문가도 아닌 일반인이 봐도 뭔가 알아낼 수 있을까요?

해독까지는 당연히 무리다. 다만 스캔본을 몇 페이지만 넘겨봐도 왜 학자들이 이 정도로 매달렸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실제로 아마추어 애호가나 대학원생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특정 글자의 출현 빈도를 분석해 작은 논문 한 편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전문 학위가 없어도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재미 자체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셈이다.

6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은 여전히 예일대 서고 한켠에서 조용히 자기 비밀을 지키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암호분석가들도, 최신 인공지능도 아직 완전히 뚫지 못한 텍스트가 21세기에 하나쯤 남아 있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묘하게 든든하기도 하다. 언젠가 누군가 이 문자의 진짜 의미를 밝혀낼지, 아니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채로 남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때까지는, 이 책을 펼쳐본 사람 모두가 똑같이 낯선 글자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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