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니치 필사본, 600년째 아무도 못 푼 정체불명의 책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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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봄, 로마 근교의 한 저택. 폴란드 출신 고서적상 빌프리드 보이니치는 낡은 목재 서랍장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재정난에 몰린 예수회 소유 도서관이 소장품을 은밀히 처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참이었다.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던 그의 손이 어느 순간 멈췄다. 양피지 한 뭉치, 처음 보는 글자로 빼곡한 책 한 권이었다.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는 종이 위에 낯선 식물과 벌거벗은 여인들이 그려져 있었다니, 그 자리에서 곧바로 값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손에 넣은 책이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해독 문서로 남아 있는 보이니치 필사본이다.

옛 서랍장 속에서 발견된 낡은 필사본

지금 이 책은 미국 코네티컷주 예일대학교 바이네케 희귀본 도서관에 ‘MS 408’이라는 번호로 보관되어 있다. 총 240쪽 분량, 가로 16cm 세로 23.5cm 정도의 작은 판형인데 실물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하게 손에 착 붙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종이가 아니라 동물 가죽으로 만든 벨럼(vellum) 재질이기 때문이다. 2009년 애리조나대학교 연구진이 이 벨럼 조각 몇 개를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 돌렸는데, 결과는 1404년에서 1438년 사이였다. 다시 말해 이 책의 재료가 된 동물이 죽은 시점이 그 무렵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흔히 나돌던 로저 베이컨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성설은 사실상 설 자리를 잃었다. 두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이거나 활동 시기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낙서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겨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처음 보는 글자가 25만 자 넘게 반복되며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흘러가고 있어서다. 단어 길이 분포나 글자 간 등장 빈도가 자연 언어의 통계적 특징과 묘하게 닮았다는 분석이 여러 차례 나왔다. 암호 연구자들은 이 정체불명의 문자를 그냥 ‘보이니치어’라고 부른다. 알파벳도, 한자도, 아랍 문자도 아닌 20여 개의 낯선 기호가 반복되는데, 놀랍게도 실제 존재하는 어떤 언어 체계와도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삽화도 만만치 않게 수상쩍다. 책의 앞부분은 식물 그림으로 채워져 있는데 뿌리와 잎, 꽃의 모양이 실존하는 어떤 식물과도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중반부에는 별자리와 태양, 달의 위상을 그린 듯한 원형 도표가 이어지고, 후반부로 가면 벌거벗은 여성들이 초록빛 물이 담긴 욕조나 관 모양의 구조물 속에서 서로 연결된 관을 타고 흐르는 장면이 반복된다. 산부인과 치료나 목욕 문화를 담았다는 추정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들어맞지는 않는다.

손글씨로 빼곡한 옛 문서 페이지

해독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21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의학사학자 윌리엄 뉴볼드는 자신이 암호를 풀었다며 로저 베이컨이 남긴 과학적 통찰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학계는 열광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제시한 해독 방법 자체가 임의적이어서 같은 방식이면 사실상 아무 문장이나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반박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 국가안보국(NSA) 소속 암호해독가 프레스콧 커리어가 참여해 필체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 성과를 냈지만, 정작 내용 자체는 끝내 풀리지 않았다.

그럼 요즘은 다를까 싶어 찾아보면, 최근 몇 년 사이 인공지능을 동원한 시도가 부쩍 늘었다. 2019년 한 연구자는 라틴어와 여러 유럽어를 뒤섞은 축약 표기라는 주장을 내놓았고, 2025년에는 이탈리아 방언을 속기 방식으로 옮긴 여성 대상 의학서라는 가설이 다시 주목받았다. 2026년에 들어서는 자체 학습시킨 거대언어모델로 상당 부분을 해독했다는 연구팀까지 등장했다. 그런데도 언어학자들 사이의 반응은 싸늘한 편이다. 패턴을 그럴듯하게 짜맞춘 것일 뿐 실제 의미를 옮긴 게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데이터와 학습 과정이 공개되지 않아 다른 연구자가 검증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고 한다.

촛불 옆에 놓인 고서와 두루마리들

그렇다면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일까. 크게 세 갈래 가설이 오간다. 첫째는 실제 언어를 치환한 암호문이라는 설이다. 15세기 유럽 궁정과 수도원에서는 자산이나 처방을 숨기려는 목적의 암호 사용이 드물지 않았으니 개연성은 있다. 둘째는 특정한 규칙에 따라 새로 만든 인공 언어, 조어(造語)였다는 설이다. 뜻 없는 소리라도 일정한 문법 규칙만 지키면 통계적으로 자연 언어와 비슷한 패턴이 나올 수 있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셋째는 애초에 아무 의미가 없는 정교한 사기극이라는 설이다. 영국 킬대학교의 심리학자 고든 러그는 15~16세기에도 사용 가능했던 기계적 표를 이용하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흡사한 무의미 문자열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실험으로 보여준 바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지 필사본이 사기극이라는 확증은 아니다.

희한한 점은 이 책이 그냥 방치된 낙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벨럼 값이나 안료 값을 생각하면 제작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이 책을 소장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서, 적어도 당대에는 값어치 있는 물건으로 취급되었다는 정황이 뚜렷하다. 누군가 오랜 시간과 비용을 들여 만든 물건이라는 사실과, 그 목적이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사실 사이의 간극이 이 필사본을 600년 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만든 셈이다.

자주 묻는 질문

보이니치 필사본은 지금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원본은 예일대학교 바이네케 희귀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반 열람은 제한적이다. 다만 도서관 측이 전체 페이지를 고해상도로 스캔해 온라인에 공개해두어서, 인터넷으로는 누구나 실제 필체와 삽화를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다.

정말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나요?

현재까지 학계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완전한 해독은 없다. 부분적인 규칙성이나 통계적 특징을 밝혀낸 연구는 여럿 있었지만, 문장 단위로 의미가 통하는 번역을 내놓고 다른 학자들의 검증까지 통과한 사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AI로 해독됐다는 뉴스는 믿어도 되나요?

단정하기는 이르다. 대형언어모델은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데 능하지만, 그 문장이 실제 원문의 의미와 일치하는지는 별개 문제다. 학습 데이터와 검증 절차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독립된 연구자들의 재현이 뒤따르기 전까지는 하나의 가설로 받아들이는 편이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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